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 애니메이션을 최근에 쭉 봤다
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유명한 애니메이션 중 하나라서 어떻게든 참고 봤다. '이세계 전생'이라는 장르(소재) 자체가 일단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유명하니까 본 거다. 1기(1~25화)는 다 봤고, 2기는 처음 몇 화(26~28화) 정도만 보다가 포기했다. 더는 몰입도 안 되고 2기는 1기에 비해 평가가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서...
내가 받은 느낌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물들의 매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그렇게 느꼈나? 그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너무 경박해서 계속 보면 결국 짜증이 남.
- 스바루(주인공)
2. 성격이 너무 평이해서 '인간'이라기보다는 '예쁜 기호(아이콘)' 같음.
- 에밀리아(주인공이 좋아하는 여자)
3. 일본 만화 특유의 과장된 동작과 말투 때문에, '실재감이 있는 캐릭터'로 느껴지지 않고 그냥 유치하게만 느껴짐.
- 베아트리체(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는 어린애)
- 로즈월(에밀리아 저택의 주인)
- 페텔기우스(스바루와 렘을 공격한 종교인)
4. 등장인물의 과거사나 속사정이 그다지 애틋하지 않고 얄팍하게 느껴짐.
- 빌헬름&테레시아(늙은 검사와 그 검사의 옛 연인)
- 람&렘(에밀리아 저택의 메이드 자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니메이션의 팬들이 '렘'을 좋아하는 이유는 좀 알겠더라.
주인공인 '스바루'가 경박하고 멍청하고 창피한 행동만 골라서 하고, 골치아픈 현실로부터 계속 도피하고 방황하는데, 렘이 그런 스바루에게 부드럽고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계속 '위로하고+신뢰하고+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는 장면.
그리고 스바루와 렘이 페텔기우스 진영에 쳐들어가는 부분에서, 습격당한 렘이 몸이 뒤틀려 죽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스바루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기어오는 모습도, 기괴하고 무섭긴 하지만 스바루에 대한 무한하고 필사적인 애정이 나타나는 장면이어서 팬들이 렘을 좋아하는 것 같다.
물론 이렇게 '한 남자가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렸다가 한 여자로 인해 구원받고 다시 용기를 내는 이야기'는 지금껏 수많은 창작물에서 반복되고 또 반복돼온 뻔한 구조긴 하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에서의 스바루와 렘의 이야기는, 기존의 그런 이야기들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약간 차별점이 있긴 하다.
1. 스바루의 찌질함이 너무 너무 심함
어지간한 다른 애니메이션은 주인공의 매력이 너무 낮아지지 않게 하기 위해, 주인공이 멍청하고 한심한 짓을 하더라도 비교적 빠르게 정신을 다잡는다. 예를 들면, 여주인공의 눈물어린 따귀 한 대를 맞고 정신을 바로 차린다든가.
그런데 스바루는 17~18화 내내 계속 비슷한 이야기(나는 진짜 왜이럴까 이젠 지쳤고 다 관두고 싶다)만 반복한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렘이 '그래도 괜찮아요! 그래도 전 스바루를 믿어요!' 라고 계속 위로하고 응원하는데도, 스바루는 계속 계속 똑같은 말을 또 하고 또 한다. 시청자가 지겨워할 정도로 반복한다.
2. 렘의 연애감정이 무한에 가까움
그렇게 스바루가 자학과 찌질의 독백을 반복하고, 렘은 정말 질리지도 않고 괜찮다 괜찮다를 반복하는데, 보고 있으면 '이건 보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너무나 깊고 깊은 감정이다. 심지어 렘은 스바루가 에밀리아에게 연애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딱히 질투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는다. 스바루가 무슨 소리를 하든, 누굴 좋아하든, 뭘 하든, 렘의 태도는 한결같이 '스바루가 최고예요+힘내요+믿어요'인 것이다.
요컨대 스바루의 감정은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떼를 쓰고 칭얼거리는 '아기'에 가깝고, 그걸 무한히 받아주는 렘의 감정은 '모성애'에 가깝다.
렘은 겉모습은 그냥 10대 초반의 소녀인데 이렇게까지 스바루에 대해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모성애와 신뢰를 갖고 있으니, 렘의 팬들은 그런 갭에서 전율을 느끼고 그걸 렘의 매력이라고 여기는 게 아닌가... 추측된다.
스바루의 그런 찌질함도, 그걸 보듬어안는 렘의 무한한 애정도, 둘 다 이 애니메이션 18화에서 주로 나오는 장면인데, 18화의 부제가 '제로부터'다. 그리고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이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이다. 그리고 18화에서 스바루가 칭얼대는 걸 멈추고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렘이 스바루를 위해 해 준 온갖 이야기들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이 이야기 때문이다:
"(이 앞의 긴~ 내용은 전부 생략) 저의 멈춰 있던 시간을 스바루가 움직여 준 것처럼, 스바루의 멈춰 있던 시간을 지금 움직이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 봐요. 하나부터.... 아니, 제로부터!"
렘이 이런 대사를 하기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을 환기시키면서 스바루를 정신차리게 하고, 시청자들을 전율하게 하는 것 같더라
18화 이전까지만 해도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 왼쪽에 있는 'Re:'는 그냥 스바루의 '루프(계속 죽었다 살아나는)'를 의미하는 거라고 여겨지지만, 이 18화에서 렘의 대사를 통해 '다시 제로부터 한 번 더'라는 의미가 부여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